28일 여름휴가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울산 십리대밭, 대왕암공원을 찾았다. 대통령이 울산의 관광지를 찾아 나선 것은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재래시장인 남구 신정시장을 찾아 상인들도 만났으며, 돼지국밥으로 점심을 했다. 오! 내 사랑 나의 님 태화강은 언제나 아름다워라 어릴적에는 태화강 금모래사장 위를 온종일 뛰고 달리며 씨름하고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 110 ) 목화밭 아가씨 터질 듯 부풀은 하아얀 가슴을 수줍은 듯 감싸고 국화밭엔 시들은 꽃잎의 지극한 향내가 메마른 영혼을 소생시키네 푸르름이 넘실대는 십리대밭은 태화강물에 잠겨 반구대 암각화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고래 바다까지 끊임없이 흐르며 태화강의 기적의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111) 십리대밭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70) " 연어의 귀향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69) ' 가을 산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입화산에 올라 울산을 바라본다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 67 ) '눈부시게 빛나는 가을날에'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 66 ) 국화꽃밭에서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65) " 갈대밭 "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63) " 삼호섬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62) '댓잎의 속삭임'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61) 십리대밭과 사슴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 60 ) " 백로야 놀자 "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59) " 재첩, 재첩국 " 본래 태화강 태화루 아래 용금소에 이르면 수심이 깊어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 놓아도 강바닥에 닿지 않을 정도의 깊이라 대나무 장대 대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노를 저어가야 한다. 드디어 태화루 건너편 재첩마을이 있었던 태화동 화진 마을에 당도한 듯 하다. ... 1950년대 후반기 쯤 조개잡이가 가장 활발했을 때 이곳 태화 고갯마루 재첩국 마을(중구 태화동 화진마을)에는대략 7-8호의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철따라 사이좋게 농사일과 조개잡이 일을 병행했다 한다. 그래도 당시 주업은 농업이었으니 농번기 철이 지나면 부업으로 조개를 잡아 생계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고 이곳 조개잡이 1세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두갑(85세)씨가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당시에는 조개잡이 배도 조개잡이 틀(도구)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방식을 따라 자급자족 할 수 밖에엔 없기에 모두가 이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데, 배는 읍네 재제소에 가서 널빤지를 사다가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정 목수에게 주문을 하면 우선 대략 배의 형체를 만들어주었고 그 다음 공정부터는 조기잡이 배에 필요한 시설은 모두 조개잡이꾼들이 직접 완성했다고 한다. 조각배 외에도 강물 속에 들어가면 가슴까지 와 닿는 높이에서 서서 조개를 캐는데, 조개잡이 도구도 철사와 나무를 적당한 크기와 모양으로 다듬어 모두 직접 제작 했다. 이윽고 조개잡이 배가 완성이 되면 아침 8시경에 이곳 화진 부락 조개 동네 장정들이 각기 자기가 만든 조각배를 타고 줄을 지어 태화강 하구 조개섬으로 조개를 잡으러 나가는데, 보통 오후 두세시가 되면 2말 정도의 조개를 잡을 정도로 조개가 풍부했다고 한다. 당시 쌀5말이 한가마니였으니 하루 반가마니 정도는 잡는단다. 조개를 잡는 동안 물에서 온종일 일할 수는 없고 잠시 강가로 나와 점심식사를 하고 미리 배를 타고 오면서 태화교 아래 주막에서 받아온 당시 맛 좋기로 부산 경주에까지 소문이 났었던 그 유명한 울산 막걸리로 한잔씩 술과 정담을 나누며 여유로운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조개의 분포지역을 보면 당시 식수로도 사용이 된 태화강 맑은 물에는 각종 어획자원이 풍성하여 철따라 은어, 황어, 모치연어 등 과히 “물 반 모래 반”이라는 소문이 났었고, 조개도 이곳 조개섬에서 부터 태화강 상류로는 범서 언양까지 강변 모래를 한움큼 쥐면 “모래 반 조개 반 씩”이라 해도 과언이 나일정도로 풍부했다. 일단 조개를 잡아 집으로 돌아오면 큰 가마솥에 넣고 삶아서 조개가 입을 벌릴 때까지 푹삶고 그 삶은 구수한 국물을 그대로 가마솥에 남겨두고 조개는 껍질 채 건져서 다시 태화고개 아래 강가로 가지고 내려가서 채로 쳐서 조개껍질과 조개 알을 분리시킨다. 이 통실통실한 조개알을 다시 집으로 옮겨 가마솥에 들어있는 진국에다 넣고 부초와 소금과 고춧가루를 치면 이제 맛있는 재첩국이 완성된다. 재첩마을 아낙들이 끓인 강내음 강향기까지 흠뿍베인 향긋하고 입맛 당기는 따끈한 재첩국을 이제 식지 않도록 포대기로 덧씌운 국단지 담아서 머리에 이고 읍네로 팔러 나간다. 그 시절 태화고갯 마루 재첩마을에서 아낙네들이 정오쯤 되면 “재첩국 사소”하며 재첩국 단지를 이고 읍내로 내려오면서 외치는 목소리가 아직도 낭낭히 들려오는 듯하다. 늦은 봄부터 재접국은 울산 읍네 거리에서 들려오던 재첩국 아줌마들의 “재첩국 사소”하던 그 소리도 태화강의 잊을 수 없는 정겨운 소리 풍경의 하나였다. 울산 토박이라면 한낮이 지나면 태화고개에서 읍내로 내려오는 아줌마 부대들의 재첩국 소리와 누가 뭐라해도 해장국 중의 최고 별미인 따근한 채첩국 맛을 어찌 잊을 수가 잊겠는가?, 누구나 울산 토박이라면 값도 비싸지 않고 영양가도 풍부한 그래서 부담 없이 서민들이 즐겨 맛 볼수 있는 조갯국의 그 구수한 맛과 그 시절 태화강의 향수를 간직하고 있으리라 아낙들이 태화고개를 내려오면서 재첩국을 팔기 시작하여 옥교동 중앙시장까지 이르면 금새 한 단지는 동이 나는데, 다 팔아봐야 당시 살 서너 대를 살 수 있을 정도 의 시세였다고 하니 참으로 값으로 치자면 서민 대중들의 영양식이었고 술꾼들의 사랑받던 숙취용 해장국이요 진국이었다. 재첩마을을 지키고 살아가는 태화동 유일의 생존자 김두갑 옹에 따르면,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후 한나절까지 태화강 조개섬 일대에서 조개를 잡아서 각기 집으로 들고 가는 양은 많아야 하루 1-2말 정도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자기집에서 직접 재첩국을 끓여서 팔러 다녔으니, 울산 읍네의 재첩동네는 이곳 태화동 말고 삼산동에서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신도시 삼산이 아닌 구 삼산동 주민들이 십여 가호 조개섬 너머 삼산 들녁에 모여 살았는데, 이때 삼산에는 주로 부녀들이 많아 대부분 조개잡이 배도 없이 강으로 나와 재첩을 잡았는데, 이들은 또 근방 모래톱에서 백합조개도 많이 잡았다고 하며 이때 이들 아낙들이 주로 사용했던 채취 도구는 각기 농사짓는 호미 한 자루였다고 한다. 조개는 첫해에 나온 것이 아주 알갱이가 적은 햇조개라 불렀고 조개섬의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조개잡이를 할 때는 주고 2-3년 생이 된 큰 조개들 많이 잡았다.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58) “생명의 강” ... 봄이면 금잔디 아지랑이 피는 강 언덕에서 딍굴다가
<meta http-equiv="refresh" content="0; URL=/yongumso?_fb_noscript=1" /><meta http-equiv="X-Frame-Options" content="DENY"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57) "태화고갯마루에서"
아! 대운산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55) "비둘기 아저씨" 한평생 학교에서 아이들과 꽃만 가꾸던 곽 선생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54) " 태화다리"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53) “ 금잔디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52) " 대숲의 노래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51) " 강바람 강내음"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50) “깊고 푸른 용금소”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 49 ) " 꽃밭에서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48) 양귀비꽃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 47 ) " 울산시민의 허파 "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43) 南山寺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42) " 십리대밭 " 대나무가 주는 올곧은 푸르름과 물소리 바람소리 그 정연한 질서 속에서 뿜어나오는 한없이 풍부한 산소는 아늑한 고향의 품속처럼 ... 여름철 시원한 강변 대숲으로 찾아들면 태화강 굽이치는
" 고래바다 장생포 " 배 타고 바다 건너서 파도 배달부에게 부치면 소년의 꿈은 사랑으로 파도친다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29) 겨울 새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27) 그래도 건너편 대숲엔 선진지 견학을 온 공무원들을 인솔하고 해설사가 무언가 열심히 에코폴리스 울산 태화강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듯...
울산 태화강이 환경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전국 12대 생태관광지역’으로 지정됐다. 생태관광지역 지정 제도는 환경적으로 보전가치가 있고 생태계 보호의 중요성을 체험교육할 수 있는 지역을 선정하고 독립적으로 우수한 생태관광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이다.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25) '남산 팔각정'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25) ' 만회정 '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24) ' 태화강 백로 ' ... 백로가 너울너울 춤을 춘다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23)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21)
태화강은 아름다원라 (20)
아!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 18) 석양의 태화강 갈바람에 갈대가 서걱이는 소리
태화강은 아름다워라. “ 자전거 ”<17 > 강의 노래를 들어보았는가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올해부터 태화루도 함께 떠오르겠지?" 추석이면 울산은 텅빈듯 한적한 도시 적막한 도시란 말이 실감나는 때이다 명절 때마다 느끼는 현상인데, 110만 울산시민의 9할이 공단건설 이후 타지에서 유입 된 인구라
명절이 다가오면 수많은 이웃들이 울산을 떠나는 분주한 모습들, 거의 모두가 선물 보따리를 자가용 차에 싣고 멋진 모습으로 귀향하는 사람들...
이런 허전한 적막감 속에 매년 고향의 추석을 맞는데... 그래도 나의 사랑 아름다운 태화강변을 찾아와 옛 추억에 잠기며 내 생명의 원천이며 영원한 사상의 보고를 더욱 아기고 자랑하고 싶다.
울산의 역사와 전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애환과 사랑을 싣고 태화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다.
누가 뭐래도 나는 니가 좋다, 내가 사랑하는 울산 나의 님이 저 보름달과 함께 담긴 맑고 청청한 태화강 올해부터 태화루도 함께 뜨오르겠지?
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 “태화강 대공원 꽃잔치” 수천 수백만 송이의 꽃처럼 피어나는 시민의 미소 태화루 아래 용금소 굽이쳐 흐른 S라인 위로 십리대밭교에도 계절의 여왕 5월은 어김없이 찾아와 꽃내음 강내음 시원한 유혹의 바람이 부는데 십리대숲을 지나 꽃단지 이건 배가 아니라 그냥 떠다니는 부교 수준이다. 수천억을 들여 대화강 마스터 플랜을 마련했고 또 수백억을 들여 태화루를 중건하면서 왜 그 자리에 진짜 추억의 나룻배는 없단 말인가? 아쉽고 허전한 마음 금할 수가 없구나. 그냥 상직적인 부교만 띄우고 선전용 기념 사진만 찍으면 그만인가? 참으로 안타깝다. 저 추억의 나룻배를 기억하는 오늘의 수령방백이 얼마 이든가? 왜 깡그리 그 좋은 기억들을 저당 잡히고 여전히 외면하려 하는지...
울산의 한 복판을 흐르는 태화강의 경치는 강 건너 구시가지 (중구)쪽에서 바라보는 신도시 남구 쪽 강변이나 또 반대편 쪽 강변에서 바라보아도 언제나 아름답다 ... 태화강 100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베리끝을 돌아 선바위(입암 立巖)를 보는 순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의 모습을 한 그 아름다움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강물 위에 내려 선 바위의 자태도 빼어나거니와 그 뒤로 용암정(龍巖亭)과 죽림과 수목이 울창한 산이 병풍처럼 자연의 조화를 이루는 배경이 더욱 신비로움을 자아내었는데... 어젠 항시 강 건너서만 바라보던 선바위 주변이 무언가 허전 하길래 선바위 가까이 건너가 보았더니 아! 바로 이 뒷쪽에 용암정을 마주하고 이었던 암자 하나가 아름하여 선암사라 하며 요사채를 증축하고 공양실을 확장한다면서 주차장을 만들고 주변의 숲을 몽조리 벌채아여 이렇게 주변 경관을 삭막하게 해 버렸으니... 이곳 선바위 주변의 그 엣날의 모습이 하도 많이 변하여 그 때 그 아름다움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구나? 어여쁜 여인도 가꾸고 치장을 해야 아름답듯이 역시 선바위 주변의 경관도 우리가 무관심하여 돌보지 않고 보살피지 않는사이에 이렇게 황랑한 자태로 돌변하고 말았구나 하는 자책감에 빠지다. 자연은 가만히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돌보고 보살피지 않는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겠는가?
태화강은 아름다워
나는 본시 태화강변 외딴집에서 태어나서 금모래를 위를 종일 뛰고 또 달리며 추석명절까지 태화강에 헤엄치고 씨름하며 자랐다. 아버지는 항시 강을 좋아하고 강가에 노는 나에게 "너는 팔자에도 일렀으니, 항시 강물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학업을 마치고 꿈꿔왔던 울산공단건설의 주역이 되었고 한평생 태화강 지킴이로 태화강은 내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도 태화강변 길을 따라 걸어며 ... 내가 매일 강변을 찾는 것은 물고기들과 함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거나 가끔씩 먹이를 찾아 날아온 물새나 태화다리 밑 비둘기들을 만나러 온 것만은 아니다 지난 겨울 내내 돌아가지도 못하고 강상에 허우적거리다 오염된 강물에 때가 쩌린 한 마리 백로를 찾으려 함이다. 마치 실종 된 아들을 찾아 헤매는 애타는 애비의 그리움 같다.
태화강은 내 마음의 호수가 열리는 곳. 나는 매일 아침 태화산에 오르면 이곳을 향해 내 가슴에 파두었던 호수를 한끝 펼치며 목이 터저라 노래 부른다, 사시장철 꽃이 피어 그 옛날 시인 묵객이 끊임없이 찾아 왔다는 장춘오를 돌아 10리 대밭을 아우르며 휘돌아 흐르는 태화강 최고의 절경이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가꾸고 보존하자. 그리고 태화루도 복원하자. 이것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울산 시민의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다.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 (5) - 학춤(鶴舞)과 백로들의 춤사위를 보다 오산 대밭에서 처음 본 학은 ... 해마다 여름철이면 점차 수천마리의 백로로 변하여 휘영청 늘어진 대나무 가지 붙들고 춤추는 백로의 하얀 나래짓하며 내 가슴엔 이적 학의 모습을 한 그 백로만이 남아있다 태화강변 학성(鶴城) 공원에는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내려와 하얀 학이 산을 덮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고아한 기품을 지닌 갓을 쓴 선비가 맨 처음 학춤을 추었다는 울산 학춤, 그때 그 학이 바로 내 어린 시절에 보았고 나이 늙은 지금까지도 꿈속을 훨훨 날며 고대해온 나의 백로가 아닐까 애타게 기다려온 내 사랑 외다리 백로의 춤사위
나의 님 백로를 기다리며 오늘도 외로이 태화강변을 걷는다.
- 태화강변은 아름다워 -(3)
소바우 외딴집 뒤 대봇뚝 너머 태화강
금모래로 이 딱고 고무신에 은어 잡으며
왠종일 강물에 발가벗고 멱감고 잠방구치다가
깊은 웅덩이이 빠져 물을 한 바지기 마시고 허우적 거리며
필사적으로 헤쳐나오니 구사일생 자력으로 수영를 터득.
중학생 때 처음으로 명주실 한 타래가 닿지 않는다는 용금소를 헤엄쳐 건너
사철 곷이 핀다는 장춘오 수양버들 그늘에 앉아 용금소 절벽에 다이버들의 멋진 포즈를 바라보며 수박, 꿀참외 맛들이고 밀서리 무용담으로 즐거운 하루 해가 기울고, 노을이 물들면 멀리 조개잡이 배들이 긴 대나무 장대를 밀치며 태화고갯마루 재첩동네 화진 마을로 거슬러 올라 온다
강 건너 보이는 내오산의 이름을 따서 십리대밭은 본래 오산대밭이라 불렀는데 송죽(松竹) 같은 절개라 했던가? 세상 오만 근심걱정이 실타래처럼 엉킬 때는 ... 이곳 대숲에 걸으면 속 쉬원히 날 비워준다 공단이 건설 될 시기에는 태화강 금모래와 맑은 물이 태화강의 기적을 낳았고 삼호다리 아래 철따라 은어, 황어, 잉어가 물반 고기 반으로 넘쳐나 강물 위에다 즉석 횟집들이 성시를 이루었지...
죽음의 강에서 생명의 강으로 100 시민의 미소로 빤짝이고 봄바람 강바람 불어오면 봄내음 강내음 향기로운데 유혹의 강물은 쉼 없이 출렁인다.
태화강 갈매기의 춤
' 목련화는 또 피고 지는데 " 한 잎의 꽃잎 조차도 지상으로 내려다 보지 않는 ... 목련의 도도함 하얀 면사포 쓰고 온 눈부시게 화사한 봄 신부처럼 순결하고 향기로왔던 내 야망의 언덕에 피어난 목련은 올 해도 구슬픈 봄비의 시샘을 받고 비바람에 휘날립니다. 왜 목련은 비바람에 비참히 쓰러져야만 하는가? 야망의 언덕 위로 목련꽃은 피고 또 지는데....
"십리대숲“ 행복은 향기로운 숲길을 걷는 것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나누어도 부족함이 없으니 함께 나눌수록 더욱 커지네 내가 목마를 때 생수를 부어주고 가슴이 답답할 때 맑고 상쾌한 바람을 불어주며 눈이 캄캄하여 앞이 안보일 때 밝은 태양을 비춰주었다. 아지랑이 피는 금잔디 언덕을 지나 십리대숲 속에서도 맑고 파란 하늘이 열리니 맑은 영혼은 새로운 안식을 취한다. 행복은 향기로운 숲길을 걷는 것
무소속으로 대선을 치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는 안다. 나는 2번의 무소속 선거(국회의원, 구청장)를 치루면서 법정 선거비용의 절반도 못썼지만 선관위는 날 부정선거 사범으로 고발헸다. 한번은 몇 안되는 선거운동원들에게 한꺼번에 밀린 일당을 지불했다는 죄목이요 또 한번은 선거 기간에 채용한 단 1명의 여직원에게 투표를 강요했다는 죄목이었다. 이 자는 채용 1달만에 행방불명되었다가 선관위에 나타나 고발하고 사라졌다. 당시 나의 통장 잔고와 거주지 동거인까지 부당하게 사찰을 했고 기어이 날 기소하였다. 내 평생 서 보는 형사법정에서 재판장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국선변호인을 선정하면서 유죄로 몰고 갔고 내가 억울함을 진술하자 부장판사는 웃기네 코메디 아이가 하면서 중형을 선고 했고 피를 토하는 억울함을 항소로 대응하여 1심 판결을 폐기 되었으나 벌금형이 과중하여 다시 대법원에 상소했으나 경미한 사건이라 기각되고 말았다. 재판을 박고 목메달아 자살하는 억울한 사람들의 심정을 조금은 알것 같았다. 끝가지 정의의 사람으로 살다 죽을 것이다. 새시대 창조의 거름이 되고 작은 보탬이되고져...!!!
꿈 꾸는자는 피곤을 모른다. 열정, 도전, 무궁무진한 창의력이 솟아오른다. 꿈을 꾸는 동안은 행복하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꿈속에서 살고 싶다.
오늘도 태화 고갯마루에 올라서서 복원중인 사가(四佳) 서거정이 찬탄했던 영남제일경(嶺南第一景)이라는 옛 태화루의 자취를 더듬으며 울산의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르며 굽이쳐 흐르는 태화강을 바라본다. 태화강 100리는 가지산 쌀바위에서 발원하여 석남사 옥류정에 모였다 언양 남천을 지나 범서 선바위를 감돌아 다시 한 줄기는 두동 물맞이 계곡물과 만나고 또 한 갈래 물은 척과 은을암 에서 떨어지는 물이 반용천과 합류하여 마침내 삼호에서 모두 만난다.
통일 신라 3대 사찰이었던 태화사의 종루였고 뭇 시인묵객들의 명소였던 태화루에서 강 건너 삼산 12봉과 용금소 아래 거대한 S라인을 그리며 흐르는 강물과 십리대밭 대공원을 조망하며 여기가 울산의 허파라는 샐각과 함께 가슴이 뻥 뚫리는 쾌감을 맛본다.
나는 본시 태화강변 외딴집에서 태어나서 금모래를 위를 종일 뛰고 또 달리며 추석명절까지 태화강에 헤엄치고 씨름하며 자랐다. 아버지는 항시 강을 좋아하고 강가에 노는 나에게 "강물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학업을 마치고 꿈꿔왔던 고향에 돌아와서 울산공단건설의 주역이 되었고 비록 모든 것을 상실해버린 상처 뿐인 마음의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울산이 좋아 한평생 태화강 지킴이로 고향의 강은 내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며 내 생명의 원천이며 영원한 사상의 보고였다.
오늘도 태화강변을 따라 걸어며 아침이면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내려가고 또 저녁이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온다 물고기들도 나와 같은 짓을 되풀이 하는데 어느 때는 강물이 오염되어 숨질이 가쁜지 무리지어 뽈딱거리며 물위로 튀어 오르다가 낚시꾼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거나 혹 낚싯대에 걸려 올라오기도 했다
내가 매일 강변을 찾는 것은 물고기들과 함께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거나 가끔씩 먹이를 찾아 날아온 물새나 태화다리 밑 비둘기들을 만나러 온 것만은 아니다. 지난 겨울 내내 돌아가지도 못하고 강상에 허우적거리다 오염된 강물에 때가 쩌린 한 마리 백로를 찾으려 함이다. 마치 실종 된 아들을 찾아 헤매는 애타는 애비의 그리움 같은 것이다.
중학생 때 처음 용금소를 헤엄쳐 건너며 강 건너 오산 대밭(십리대밭)에 한 마리 학을 보았다. 처음 발견한 새는 학(鶴)이었는데 내 가슴엔 이적 학의 모습을 한 그 백로만이 남아있다. 태화강변 외딴집에서 대봇둑을 따라 걸으며 태화강변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물과 강변 금잔디는 나의 길동무가 되었고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온갖 상념들을 맑은 강물에 씻고 또 하늘 끝까지 닿을 듯 한 초원의 빛 속에서 펴오르는 아지랑이들 속에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아름다운 꿈을 꾸며 난 벌써 남산사에 당도한다.
떠거운 몸을 식히려고 강물에 발가숭이로 뛰어들면 물고기들이 몰려와 장난을 건다. 벌써 나와 친구가 된 물고기 떼들은 내 몸을 주둥이로 부딪치며 맛있는 먹이를 달라하고 새로운 친구를 소개하고 나도 어느새 인어가 된다.
한바탕 물고기들과 물속에서 놀다가 다시 솟아오르면 오산대밭이다. 지금은 십리대밭이라 부르는데 그 아래로 한없이 널베 펼쳐진 금모래 위를 뒹굴다가 그것도 실증이 나면 신비로운 새소리가 울려나오는 대밭속이 못내 궁금하여 대숲 속으로 들어가본다. 그때 나는 처음 학의 춤(鶴舞)과 수천 마리의 백로들의 춤사위를 보았다. 오산 대밭에서 처음 본 학은 해마다 여름철이면 점차 수천수만 마리의 백로로 변하여 휘영청 늘어진 대나무 가지 붙들고 춤추는 백로의 하얀 나래 짓하며 내 가슴엔 이적 학의 모습을 한 그 백로만이 남아있다
일찍이 태화강변 학성(鶴城) 공원과 계변성에는 계변천신이 학을 타고 내려와 하얀 학이 산을 덮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고아한 기품을 지닌 갓을 쓴 선비가 맨 처음 학춤을 추었다는 울산의 그때 그 학이 바로 내 어린 시절에 보았고 나이 늙은 지금까지도 꿈속을 훨훨 날며 고대해온 나의 백로가 아닐까? 애타게 기다려온 내 사랑 외다리 백로의 춤사위 나의 님 백로를 기다리며 오늘도 외로이 태화강변을 걷는다.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강변에 꽃이 피면 아지랭이도 피고 내 꿈도 펴오른다. 꿈이 없는 인간은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썩고 병들어 악취를 풍기며 죽어간다는데 7,80년대 인기 가수 울산 출신 윤수일은 서울에서 자주 울산의 오션호텔에 쇼를 하러 내려오면서, 옛 추억을 더듬어며 고향 강변을 거닐다가 악취를 풍기며 검붉게 물들어 신음하는 태화강변을 향해 탄식하기도 했다
그 옛날 질풍노도의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통기타 치며 노래했던 고향의 강을 그리워 하며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 나를 못 잊어/머물지 못해 떠나 가버린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를 노래했다.
장생포 환상의 섬에서 다시는 돌아보지 말자던 엄마의 바다를 향해 '사랑만은 않겠어요'라 가슴이 터져라 절규하며 노래하여 공전의 히티를 치고 일약 시골의 무명 가수가 한국의 톱 가수가 되었다. 아직도 그의 시비는 장생포 고래 박물관 앞뜰에 남아있다. 그의 소원처럼 이제 태화강은 죽음의 강에서 다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강으로 흐른다.
다시 생명의 강 희망의 강물 위로 물고기는 뛰어오르고 백로는 한가로이 갈대와 대숲이 서걱이며 노래하는 강변을 걸으며 아직도 못다한 태화강의 노래를 부른다. 새들도 맑고 푸른 100리 태화강 하늘 길을 날은다. 울산 읍네 사람들이 모다 태화강 물을 먹을 때, 아직 회야댐이 생기기 전 강변 외딴집 외아들은 매일 집뒤 대봇뚝 너머 태화강 금모래로 이 딱고 고무신에 은어 잡으며 왼종일 강물에 발가벗고 멱감고 잠방구 치다가 어느날은 깊은 웅덩이에 빠져 물을 한 박아지 마시고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헤엄쳐 나오니 이날부터 구사일생 자력으로 수영 솜씨를 터득한 셈이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명주실 한 타래로도 바닥이 닿지 않는다는 용금소를 헤엄쳐 건너서 사철 꽃이 핀다는 장춘오 언덕 수양버들 늘어진 그늘에 않아 맞은편 용금소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다이버들의 멋진 포즈를 바라보며 친구들과 수박, 참외 밀서리 무용담으로 즐거운 하루 해가 기운다. 태화강변에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멀리 조개잡이 배들이 긴 대나무 장대를 밀치며 조갯섬으로부터 강물을 거슬러 태화고갯마루 재첩동네로 올라온다
십리대밭은 본래 강 건너 보이는 만회정이 들어선 자리에 내오산의 이름을 따서 과거에는 오산대밭이라 불렀는데, 송죽(松竹) 같은 절개라 했던가? 세상 오만 근심걱정이 실타래처럼 엉킬 때는 이곳 대숲에 걸으면 가만히 명상에 잠기며 힐링(healing)하며 속 시원히 나를 비워준다. 공단이 건설 될 시기에는 태화강 금모래와 맑은 물로 공단을 건설하여 전설적인 태화강의 기적을 낳았고 당시 조선팔도에서 몰여든 기술기능인들은 유일이면 삼호다리 아래 철따라 은어, 황어, 잉어가 물반 고기 반으로 넘쳐나 횟집들로 찾아와 성시를 이루었지...
아! 태화강은 영원한 내 마음의 고향
동해의 찬란한 태양 떠오르면
눈부시게 출렁이는 은빛 물결이 보고파
태화강 용금소는 밤새워 그렇게 울었나 보다.
이철수
태화강은 날보고 대나무처럼 곧고 바르게 살라한다 죽순이 검푸른 대숲을 이루는 왕성한 생명력을 보아라 태화강물 같이 맑고 풍부한 산소를 거침없이 쏟아내며 고인 물은 썩고 병들어 주위에 악취를 풍기나니 화무는 십일 홍이요 권불십년이라(花無十日紅 權不十年) 장기집권 부패청산 일당독재 무위도식 직무유기 민주개혁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라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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