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민주노동운동의 메카 -기회의 땅 울산

울산포스트 | 기사입력 2005/09/12 [08:24]

<8> 민주노동운동의 메카 -기회의 땅 울산

울산포스트 | 입력 : 2005/09/12 [08:24]

한편 울산의 공해지역 이주민 대책 요구와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은 그 어느 때 보다 거세었고 조상 대대로 살기 좋고 인심 좋은 땅 울산에서 삶을 이어온 농어민들은 삶의 터전이 공단부지와 신항만 부지로 강제수용되어, 생활의 터전을 잃고 이주해야만 하기에 고향 잃은 이주민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투쟁의지는 더세었다.



그 첫 집회가 울산성당에서 열리자 투쟁의 중심에는 기독교 목회자가 주축을 이룬 '울산사회선교회'가 있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열혈의 청년들과 '심완'을 비롯한 일부 울산의 골수 야당 정치인들도 합세했다. 잠시후 모임이 끝나고 시위에 나서려는 집회 참가 시민들을 경찰이 출입구를 막으며 원천봉쇄작전을 펼치기 시작 했다.



현대조선소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조건에 최저 임금보장 하라고 외치며 노동3권을 보장하라는 너무나 인간적인 절규도 현대 중공업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중전기, 자동차등 계열사로 확대되어 점차 투쟁의 열기를 더하여 갔다.



노동자들이 단체행동에 나서며 시위를 벌리고 조업을 중단한 채 회사 측과 수 없이 부딪치자 드디어 서울 본사에서 '정주영 회장'이 급히 울산 현대조선소로 내려와 처음엔 수 천 명의 시위노동자들과의 직접 대화가 어려운 상황이라 강당같이 생긴 대형 작업장 건물 내에서 일정 기준을 정하여 대표들을 들어오게 한 다음 얘기를 시작하려했다. 그러나 건물 밖의 수천 명 시위자들은 “밀실 야합 반대”를 외치며 정회장이 밖으로 나와서 전체를 상대로 얘기할 것을 외쳐대었다. 정회장이 밖으로 나와 다시 영빈관 앞 넓은 잔디 광장 급조된 연단에서 수만 명의 노동자와 관리직 직원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한다.



<존경하는 현대조선소 근로자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이 울산 방어진 허허벌판 바닷가에 돈도 기술도 부족한 가운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여러분들의 노력과 땀으로 오늘 이만큼한 조선소를 짓고 또 30만 톤의 첫 유조선을 건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이에 비해서 아직도 너무 건강하고 패기에 넘치는 정회장이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고 연설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한쪽 구석 철판더미 위에 몰려있던 용접공들 중에 누군가가 소리친다.



<야 다 때리 치아라. 우리는 배고파서 일 못하겠다. 이라다가 또 족장판에서 떨어져 죽으면 개값 물어주고 초상치면 그만아이가!>



일시에 웅성거리던 무리들이



<옳소! 옳소!> 하며 함성을 지르고 정회장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황급히 마련한 마이크와 스피커 성능도 문제였지만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여기저기서 제가끔 구호와 함성, 야유를 외쳐대는 수 천 명 시위 노동자들과의 대화는 불가능해 졌다. 처음 몇 몇 군데서 산발적으로 동요가 시작되더니 조선소 광장에 모였던 수만명의 노동자들이 하나의 인간 장벽을 이루며 정회장을 향해 조여들기 시작한다.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정회장은 대책 없이 수 천 명의 시위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위기감에 겁에 질려 정회장을 보호하려는 몇 명의 조선소 간부들의 필사적인 노력은 큰 파도 앞의 갈대와 같이 역부족이었다.

이제는 현대 조선소의 노사 대화보다, 당시 이미 70대 중반에 들어선 노구라 할 수 있는 정회장 신변의 안전이 전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중요 TV와 라디오가 상황을 생중계하는 상황이 되었다. 정회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서서히 뒤쪽으로 몸을 피했지만 자신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감히 누구도 이 현대왕국의 왕회장에게 감히 이런 도전과 돌발사태는 예상하지 못했던 터이라 회사 경비들과 사복 경찰들이 집중하여 정회장을 보호하려 해도 막무가내이며 일촉즉발 어떤 사태가 발생 할지도 모를 위험한 순간이다.



정회장이 회사 담벼락 나무 아래로 피신했을 때 한 늙은 노동자가 나서서 정회장 앞을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으며 흥분하여 밀려오는 젊은 노동자들에게



<이라면 안 된다. 이라면 우리가 진다. 우리는 깡패가 아니다 현대 직원이지 폭력배가 아니다.>



계속 소리 소리치며 행동을 자제할 것을 주문한다. 주변의 동조하는 일군의 동료들도 차츰 무리지어 모여들기 시작하자 다시 힘을 합쳐 모두가 자중할 것을 노동자 동지들을 향해 간곡히 권유하며 서서히 돌발사태를 잠재우기 시작했다.



이런 사태가 거의 4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다행히 시위 노동자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틈을 타서, 이 위기의 절체절명의 순간을 재빨리 간파한 경비대장과 사색이 다된 회사간부들 그리고 사복경관들이 민첩하게 정회장을 호위하여 뒷문으로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현대의 왕회장이 성난 노동자들의 함성에 밀려나자 다시 노사가 갈려져 싸우고 드디어 경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여 나서면서 삽시간에 방어진 일대가 투석전과 폭력사태로 아수라장이 되어 방어진 전하 파출소가 박살이 나버렸다.

 


정회장은 현장을 빠져나와 서울로 향했다.

“정회장이 아무리 건강해도 그 연세에 4시간 동안이나 선채로 흥분한 시위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아수라장의 분위기 속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며 갇혀 있었으니 심신이 탈진 상태일거다. 아마 어디 병원에라도 가서 며칠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할 거야.”

뉴스를 지켜 본 많은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특히 전경련 임원들은 많은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을 빗나가는 완전한 기우였다. 상경한 정회장은 그날 저녁 전경련 명예회장 자격으로 당시 현직 회장이었던 구자경 회장을 비롯하여 전경련 사무국 임원회를 소집하여 대책논의에 들어갔다. 그의 심신의 상태와 표정은 바로 몇 시간 전 그런 일을 겪었던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 진압작전을 펴 진입한 경찰./조선일보DB
▲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현장에 진압작전을 펴 진입한 경찰.
 

“그런데 말이야, 그 친구들한테 둘러싸여 한참 구호와 함성을 듣고 있자니까 한 순간 나도 머리띠 두르고 그 친구들 사이로 내려가 함께 하늘로 주먹을 뻗으며 구호와 함성을 지르고 싶어지더라고. 원래 내가 노동자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봐. 그런데 나는 누구를 향해서 구호를 외쳐대야 하나 생각하니 안 되겠어. 그래서 그만 두었어, 하하하!”

회의 중간에 느닷없이 던진 그의 말에 우리는 너무 어이가 없어 태연히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할 말을 잃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언뜻 수긍이 안가는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노동에 대한 경외심과 노동자들에 대한 속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젊은 시절 부두 노동자로, 건설 현장 노동자로 무거운 돌짐을 지고 가파른 비계를 오르며 허리가 휘는 노동을 해봤던 경험을, 고난의 시기로 기억하기보다 노동과 땀의 참된 가치와 보람을 느끼게 했던 값진 수양의 기회로 회고하며 흡족해 하였다.

노사분규는 급기야 석 달 열흘 씩 이어지는 극렬한 파업사태로 발전되고 결국 노사정의 협상이 결렬 되면서 정부가 회사 측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며 노동자의 수에 필적할 만큼 수 만 명의 전투경찰을 투입하여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처절하고 강압적인 진압 작전이 전개되었다.



조선소 녹털이용 중장비 차량을 앞세운 현대중공업의 3만여 근로자들이 오토바이를 앞세우고 구시가지까지 진출하여 노동3권을 부르짖다가 다시 방향을 틀어 시청으로 몰려들며 관용차량에 불을 지르고 시청사에 돌과 화염병이 비 오듯 날아들고 유리창과 기물이 파손되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13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친 다음날 '이철'은 그동안 군사독재 정권의 종식과 이 땅의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감행하며 함께 동고동락했던 동지들 앞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그들의 노고를 위로한 후에, 비장한 자세로 새로운 각오와 결의를 되새기며 사자후를 토한다.



그의 목소리는 어둡고 험난했던 선거전을 치르고 난 사람 같지 않게 싱싱했고 아직도 맑고 패기에 넘쳤다.




<태화강 100리 굽이굽이 기름진 들판이 뻗어 내린 곳, 살기 좋고 인심 좋다던 울산이 지금은 오염된 공기와 썩은 물을 마시고 점점 시들어 가고 있다. 고향을 상실해 가며 태화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는 울산공단의 오늘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수출 제1지역이 공해 수입지대로 변모하더니 온산, 여천, 부곡, 용연 공단 주민들은 이제 자손 대대로 살아온 정든 산천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고 쫓겨 간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겠지요?



울산 공업도시의 공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상 대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던 정든 고향 땅을 떠나거나 혹은 몇 푼 안 되는 보상으로 강제 철거시키는 잔인하고 임시방편적인 행정 처사에 이주대책은 근본적으로 다시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항구적이고 범시민적인 울산의 공해 완전추방 특별대책기구의 설립이 시급합니다.



한 달에 생계비 미만의 저 노임에 혹사당하고 공해 속에 병들어 가는 노동자들이 양심선언을 하며 산재를 입고 신음하는 불쌍한 동료를 돕기 위해 사용자에게 항의를 하고 급기야 온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하는데도, 수많은 노동자들의 노임을 착취하고 농민들의 토지를 수용해간 재벌 그룹들은 지금 어디에서 또 새로운 전략을 가다듬고 있을까요?



최저 임금보장이라는 빚 좋은 개살구로 노동자, 농민을 우롱하며 그간 군부독재는 이 땅의 근로대중의 신성한 땀의 대가를 가로채고 착취하여 금력과 권력의 왕국을 건설하고 소수 족벌 재벌을 기생시키고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항구적인 노동정책을 마련하고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여 노사가 고르게 잘 살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시는 노동쟁의로 인하여 도시가 마비되지 않고 온 시민이 더불어 평화스럽게 살 수 있도록 노사 문제를 민주적으로 순리대로 풀어나가는 자율기구를 설치하고 노와 사 그리고 시민 대표가 함께 협의하는 항구적인 울산의 노사 시민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여야겠습니다.>



이철의 연설이 끝난 후에, 다음 날 당원 동지들과 지지자들이 모여 이철의 성남동 196-6 번지 2층 사무실에서 "이철연구소"의 현판식을 열 것을 결의하고 해산했다.



한편 울산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해 오던 민주화운동 추진 세력과 해직 교사들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8시간 노동, 기본 생계비 보장, 노동3권을 을 줄기차게 주창하며 직접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집합체였던 울산사회선교회는 그간 무수한 탄압 속에서도 그 조직이 더 확대되고 더욱 가열 찬 투쟁의 조직체로 다시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라는 이름으로 갈고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온종일 시가지를 뒤지며 새로운 사무실을 물색하던 중 거의 모든 건물주들이 혹 자신들에게도 경찰의 감시와 권력기관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까 보아 임대계약을 체결하고도 이를 취소하여 아무도 장소를 빌려주지 않으려 하자, 숙의에 숙의를 거듭한 결과 최종 결론으로 신공화당 '이철'의 사무실 3층을 얻어 보기로 의논을 하고는 '이준' 시인을 대표로 보낸다.



그간 잃어버린 고향을 아쉬워하며 항상 이철과 함께 오랜 군사독재 정치 타도를 외쳐 왔고 또한 문학인의 현실참여와 창작과 비판적 논쟁자였으며 한편 민주화운동에 동정적 참여자로서 아웃사이드의 오랜 동지이기도 한 '이준' 시인이 울사협을 대표하여 건물 임대 문제로 이철의 사무실을 찾아왔다.



'이철'은 지난 선거에 별로 얼굴을 비추지 않던 '이준'이 갑자기 나타났기에 다소 원망하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면서도 금세 소탈하게 하하 웃으며 오랜만에 자신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반가이 맞이하며 자리를 권하고는 '이준'의 방문 목적인 본론부터 듣기로 한다.



<이형 지난 선거에는 선전했소. 그 용기 높이 사고 싶소. 그런데 이제 울산의 야당 위원장이라도 장소를 빌려주지 않으면 우리 "울사협"은 아무데도 갈 곳이 없는 처지가 되었소. 제발 부탁이니 이형 건물 3층을 우리에게 좀 빌려주시오>



이철은 별 주저함이 없이 한때 심정적으로 그들과 뜻을 같이했고 종종 '이준'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던 단체인지라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이 가는 듯 거절하지 않는다.



<내가 도울 여력이 있다면 지금은 장소를 빌려주는 것 말고는 달리 없을 도울 것이 없소. 그러니 좋은 날을 골라서 언제든지 이사를 하도록 하십시오.>



<이형, 고맙소 내 그런 대략 기대는 하고 '울사협'에다 언질을 주고 왔습니다만, 지금 우리 형편이 재정적으로 전세를 걸만 한 힘이 안되니 우선 계약금 조금 받고 차후에 모금이 되는 데로 잔금을 지불토록 할 터이니 양해를 해주시오>

 

이철은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고,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러 말하지 않고

 

<그렇게 하세요.>

 

하고는 화제를 다시 문학과 정치적 현안 관심 문제로 돌린다.



이렇게 해서 1988년 구월 초사흘, 중구 성남동 196-6번지에 민주노동운동가들과, 민주화 추진세력, 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울산 민주화 운동과 한국 노동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던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의 역사적인 산실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고 동시에 한 10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해직 교사들인 노옥희, 정찬모, 장영권등이 중심이 된 울산교사협의회도 함께 하여 온갖 억압과 시련 속에도 민주화 운동의 대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밤낮 없이 경찰 정보요원의 삼엄한 감시 하에서도 저녁시간이면 '이철'의 2층 사무실 반쪽은 여전히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원이기에 수강생이 모여 들고, 3층과 증축한 옥상 4층 조립식 "울사협" 사무실에는 울산 민주노동운동의 주동자들과 민추협의 시민운동가와 일부 종교인 그리고 울산대학 총학생회 간부와 민족학교를 운영하는 장태원씨, 이어서 전국교직원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해직 교사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투쟁의 열기를 높인다. 이 때부터 이 건물 옥상 큰 물탱크에는 물 대신 항상 화염병들로 가득 가득 차 있었다.



연일 노동운동의 주동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건물을 포위하고 형사들이 수색을 하고 또 정체불명의 테러가 자행되는 판국이라 정치를 하는 신공화당 지구당위원장에다 전직 교사였던 '이철'의 처지도 매우 곤혹스러웠다.



출입구 계단까지 전투 경찰이 몇 주 째 막고 있으니 이철이 운영하던 외국어학원에 학생들도 겁을 먹었던지 차츰 떨어져 나가고, 울산경찰서장은 수차 은밀히 형사를 보내어



<저들을 내쫓으면 내가 전세금 전액을 보상해 주겠으니 내보내달라.>



는 말도 서슴지 않았으나 이철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내 집에 세든 사람들이니 그들을 임대기한까지는 보호 할 의무가 나에게 있습니다.> 하고는 건물주로서 임차인을 보호하기 위해 임대인의 의무에 최선을 다했다.



정체불명의 테러 사건과 전투경찰의 건물 포위, 이듬해 민주, 민족, 인간화 교육의 기치 아래 일어났던 참교육의 함성이 들불처럼 맹렬한 기세를 떨쳤으나, 독재의 군화 발에 무참히 짓밟히고 탄압이 그치지 않자, 민주당의 노무현, 박영, 최영근의원이 현대중공업 노사분규 현장을 찾은 후에 이곳 "울사협"에 들려 이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당에서 재야 민주화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3층 사무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모든 정치, 문화 교육 권력들이 적대시했던 '울사협' 또한 울산사회가 보수와 개혁 진영이 극명하게 분열 대립되어 가고 노동자들의 대투쟁과 전투경찰의 진압작전이 마치 육해공군이 합동작전하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우리 모두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참 용기를 가지고 어떤 곳에서라도 진실을 밝혀 나가야겠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역사의 순리에 따라 모든 진실은 언제고 밝혀지고야 말고 정의는 승리하는 법. 민주주의의 파수꾼이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되고 참 빛이 어둠을 물리칠 때 곧 민주화가 실현되는 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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