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민주화의 역사 "영남당의 태동 <2>" 대현 배밭과 치술령

박정희에게 이병철의 울산공단 청사진 제시, 울산출신 손영길 장군 배석

울산포스트 | 기사입력 2021/01/10 [08:42]

울산민주화의 역사 "영남당의 태동 <2>" 대현 배밭과 치술령

박정희에게 이병철의 울산공단 청사진 제시, 울산출신 손영길 장군 배석

울산포스트 | 입력 : 2021/01/10 [08:42]
흔히들 이승만을 외교의 천재요 인사엔 등신이라 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18년 동안 그의 용인술(用人術)은 가히 귀신같다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장기 집권을 누리다가 무참히도 마지막 그가 가장 믿고 중책을 맡긴 동향 친구이자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가버리자 그간의 평가가 무색하게 되었고 사후 그의 업적을 평가하는 자리에 다시는 용인술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 초기에 박정희와 울산 출신 우석 이후락 비서실장의 절묘한 운명적 만남은 혁명과업수행에 가속기를 달듯이 가히 그의 분신의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측근은 전해주고 있다. 그러기에 결국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신망이 두터웠던 HR(이후락)을 은밀히 북한에 특사로 보내어 김일성을 만나게 하고 역사적인 7.4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이 대현면 고사리에서 1962년 울산공업센터의 기공식장에 참석하여 "보릿고개를 없애고 신라의 번성을 되찾겠다"고 선언한 이 날이 바로 울산공업센터에서부터 역사적인 전국가적 재건사업이 시작되었던 날이요, 새마을 정신으로 우리 민족중흥의 기틀을 마련할 새로운 기운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던 날이었다.
 
우리(울산 사람)가 흔히 말하고 알고 있는 '울산공업센터' 지정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분은 울산 웅촌 출신의 이후락 비서실장였다는 통설을 뒤집는 증언들이 요즘 많이 등장한다. 울산대학 이달희 교수나 심완구 전 시장이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독대한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한 것이다"란 말이 더욱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 최고의 재벌이자 삼성의 창업주였던 이병철이 울산공업센터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사람의 울산 출신의 불운했던 장군의 증언도 있다. HR(육사8기)과 같은 육사(11기) 출신으로 한때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의 전속 부관이었던 손영길 장군은 1962년 1월2일 새해벽두에 열린 브리핑 장소에 박 의장과 동석했고 박정희 의장은 울산지정이 완료될 때까지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라는 함구령을 그 자리에서 내렸다. “이병철씨는 울산은 조수간만 차이가 거의 없고, 대형 선박의 동시 접안이 가능한 깊은 수심의 항만, 저렴하고 광범위한 공업용지, 태화강과 회야강 등 충분한 공업용수, 전국 철도망과 연결되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 등에서 국가산업단지 최적지로 추천한다"고 했다. ”박 의장은 이후 1962년 1월13일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같은 달 27일 특정공업지구 울산지정을 전격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손 장군은 박 의장이 1962년 2월3일 기공식 현장에서 직접 들고 읽었던 ‘울산공업지구 설정 선언문’을 가지고 있다가 울산시에 기증, 2019년 울산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손영길 장군은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및 연대장을 역임했고 5·16혁명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전속부관으로 3년간 지내다 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1973년 발생한 이른바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강제 예편되었으나 2019년 재심을 통해 38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명예를 되찾았다.
 
하여간 HR(이후락)가 JP(김종필)과 권력의 핵심에서 쌍벽을 이루며 당시 나는 새도 덜어뜨린다는 세도하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인 2인자요 박정희의 남자로 비서실장과 정보부장을 지낸 득으로 울산에서는 많은 혜택을 입은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은 현대그룹의 창업주 정주영에서 상속자 정몽준 이사장으로 넘어갔지만 울산대학을 포함한 수많은 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울산육영재단 설립 그리고 방송국도 있었고 또 최근까지 생존한 울산 출신의 중앙에서 출세한 인물 중에는 그의 득을 톡톡히 본 사람들의 이름은 정재계를 망라하여 일일이 나열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중에는 이후락이 추천했던 교육자 설두하 교장과 6촌 처남이자 친구인 사업가 김원규 씨등이 모두들 우석의 공화당 공천을 받아 ‘공천만 받으면 따놓은 당상이라’는 국회의원에 무난히 당선되어 일약 여의도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울산의 영남당도 태동하기 시작한다.
 
 
 
대동연탄주식회사를 설립한 성공한 사업가이자 7선의원으로 제3·5·6·7·8·9·10대 국회의원을 역임 울산의 연탄재벌 (해석) 정해영은 수많은 울산의 젊은이들에게 서울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동천학사라는 무료 기숙사를 세웠고 또 고향 울산 농촌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서울의 일자리를 마련하여 그가 세운 연탄공장에서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의 동시대 울산 출신 사업가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성탁은 역시 자신의 호를 딴 풍곡탄광주식회사를 경영하여 거부가 되었고 정치에도 입문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정해영이 자유당에서 제명되어 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고, 무소속 정해영 후보를 걲고 당선되었다
 
김원규는 이후락의 6촌 처남으로 정치 입문 전 대원어업주식회사, 울산흥업주식회사, 언양잠사주식회사 등에서 대표이사를 역임하는 한편 한국원양어업협회 이사도 겸직한 사업가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상남도 울산시-울주군-동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최형우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이후락의 추천으로 7대 민주공화당으로 국회에 입성한 설두하 교장은 교육자 생활을 할 때 보인 청빈함과 모범 득분이었다. 그는 국회의원들 중 한문을 가장 많이 알았고 특히 <사서삼경>에 달통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자주 <사서삼경>을 강론하곤 했다. 설두하는 1899년 반구동 서원 마을에서 설령(薛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래로 근하(槿廈), 창하(昌廈), 문하(文廈)가 있었다. 울산초등학교 3회 졸업생이었던 그는 당시 수재들이 다닌다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고교) 출신으로 풍금을 잘 탔고 ‘울산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검도 3단의 유단자이기도 했다. 정치인으로서의 입지나 활동하는 미미했으며 3선 개헌 반대하여 그를 밀어준 우석 이후락을 크게 실망시키기도 했다
 
 
 
 
 
울산이 살기 좋고 인심 좋은 고장이라고 전국에 소문이 났던 이유도 기실은 해산물과 농산물 등 먹거리가 풍부했고 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태화강 100리 굽이치는 기름진 들녘에서 실어 나르는 농산물과 동해안 청정 해역의 해산물과 장생포 고래잡이가 불과 인구 3만의 한적한 읍내였으나 이미 "살기 좋고 인심좋기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고 특산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특히 울산읍내와 고래잡이로 번성했던 장생포 항구의 중간지점쯤 여천고개에 이르면 여기서부터 넓은 언덕으로 펼쳐지는 대현면 배밭은 그 입지적 조건부터 기름진 옥토에 자라며 해풍을 받아 익어가는 배 생산단지로 전국 최적지여서, 대현배 하면 그 크고 단물이 베어나는 맛좋은 전국 최고의 배 생산 단지로 이미 나주배를 능가하여 전국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여천고개에서 선암호수까지 기름지고 광활한 땅에 배밭들은 울산의 과수 부농으로 장생포의 고래배 소유자들과 더부러 울산의 경제를 좌우할 정도의 재력과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석유화학공단 건설에 참여하는 외국인들을 만나면 한결 같이 울산의 크고 맛좋은 대현 배 가 꿀맛 같이 좋다고 칭송하며 공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국 할 때는 꼭 한 상자씩 사가지고 가서 가족들에게 귀국 선물을 하겠다고하면서 애기 머리통만한 크기의 달고 물 좋은 대현배 맛에 원드풀을 연발했다.
 
당시 장생포 고래배를 가진 선주를 울산 제일등 부자로 쳤는데 바로 언덕 너머 대현면 배밭 주인들도 이들 못지않은 부농들로 일찍부터 울산의 배조합을 만들어 한적한 농촌지역이었던 울산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컸고 또 전국적으로도 과수재배에 관한한 울산배 하며 최고최신의 신영농 기술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공단이 들어서면서 이 넓은 대지가 순식간에 석유화학단지의 공장부지 중심이 되었고 일부는 공해차단 녹지지역으로 묶여 일시에 모두 피땀 흘려 일군 농토와 과수업을 중단하고 정든 고향땅을 떠나야만 했다. 물론 상당한 토지 보상을 받고 공단에 편입되었기에 여전히 대현 배밭 주인들은 거금을 들고 시내(중구)쪽으로 진출하여 빌딩주인이 되기도 한고 일부는 울산의 변두리 농촌지역인 농소, 척과 서생면 등으로 옮겨 배농사를 계속이어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장생포 고래배 사장들도 이때쯤부터 전 세계적인 포경금지령으로 포경을 을 중단하고 떠남으로 번성했던 장생포도 여천고개 배밭과 함께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대현면 배밭집 아들 심완을 처음 만난 곳은 서울의 "치술령"이란 옥호를 단 그가 운영하는 유명한 불고기 식당에서였다. 이 한옥 식당은 이미 재경 울산 향우들 뿐만아니라 종로 바닥에 내노라 하는 특별히 정치인들 사이에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최우가 다혈질의 투사형이라면 함께 김영삼의 가신으로 또한 식객이 되어 정치 수업을 받으며 드나들던던 심완은 바지런한 선비형의 신사였다.
 
치술령이 울산 사람들 특히 정치 지망생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심완은 배 밭집 아들의 경제적 여유와 특유의 친화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장차 고향 울산으로 내려가서 정치를 시작 할 만반의 준비를 하며 수많은 고향 울산 사람들과 교류하며 벗으로 혹은 동지로 만드는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기에, 이때부터 이미 야권 당수의 사랑방에서 정치적 야망과 식견을 쌓았기에 후일의 마당발이라는 별명을 달고다니게 되었다.
 
물론 이 식당에 와서 불고기를 잘 먹고 가는 젊은이들 중에는 대부분 가난한 시골 출신의 고학생이거나 정해영 전 국회부의장이 지어준 동천학사에서 기거하며 공부하던 울산의 청년들로 돈을 내지 않거나 혹 모처럼 찾아온 고향 사람들을 보면 돈을 내려고 해도 심완이 이를 적극 만류하여 비록 식당에 손님은 끊이지 않았지만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던 이유도 돈벌이 보다는 후일을 위해 덕을 쌓고 좋은 인심을 얻고 있었다.
 
소대가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숙은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한동안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선거 때면 열혈의 청년 투사로 탄압 받는 야당 후보를 위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힘써 도왔기에 당시 최우 의원과 심완에게는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숙이 다시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올라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철은 이미 대학 3학년이었는데, 어렵사리 그의 소재를 찾고 연락이 되어 명동 학사주점에서 모처럼 만나 회포를 풀고 헤어지면서
 
<다음에는 내가 잘 아는 치술령이라는 식당에 데리고 가서 멋진 선배를 한분 소개 해 주겠네.>
 
<그래 너 울산촌놈이 서울에 온지 몇 달 되었다고 벌써 종로통에 잘나가는 불고기 식당을 다 아냐, 그래 다음에는 니 따라 그곳에 한번 가보자.>
 
이렇게 해서 그 유명했던 치술령 불고기 식당에서 후일 알게 된 중학교 대선배인 심완과 이철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치술령식당에 들어서니 벌써 초저녁인데 한식 기와집을 개조한 식당 큰방 아랫방에 제법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현관에 들어오는 우리 일행을 쳐다보면서 저만큼 큰방에 손님과 마주 앉아있던 심완이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맞는다.
 
<어 이숙 자네 서울에 왔으면 진작 날 찾아 올 것이지 왜 이제 나타난 거야? 그래 어떻게 된 거야 이 답답한 친구야>
 
<죄송합니다. 사실 집안 형편을 보면 도저히 서울에 이렇게 올라와 대학에서 공부나 할 처지가 아닌데 눈 딱 감고 한분 어머님께 조금만 참으시라 설득을 하고 농사일은 동생에게 모두 다 맡기고 소 한마리 팔아서 대학 학자금 마련하여 억지로 밀어 붙였습니다.>
 
<좌우간 축하한다. 옆에 분은?>
 
<네 안녕하십니까 심 선배님? 이철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으나 진작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저는 서울온지가 2년이나 되었습니다.>
 
우린 치술령 주인 내외가 차려주는 숯불에다 불고기를 부지런히 구워먹으면서 그동안 못 다한 밀린 이야기도 실컷 했다.
 
<내가 서울에서 고향 울산으로 정치를 하러 내려갈 준비를 오래 전부터 했다. YS의 가신으로 이미 10년이 되었으니 이젠 때가 되었는데, 아마도 나만큼 많은 사람을 알고 또 울산에 많은 동지를 심어 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좌우간 곧 내려 갈 터이니 이숙 자네 같은 의리의 사나이와 친구라면 이형도 날 좀 도와주시게>
 
<네 잘 알겠습니다. 꼭 결심한 바 꿈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모처럼 맛본 울산 불고기에다 정종까지 제법 마셨으니 기분도 얼큰한데, 이윽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 쪽으로 나가려 했으나 심완이 재빨리 나서며 한사코 돈을 받지 않고 만류하며 오히려 자주 들리라고 당부까지하면서 현관까지 따라 나와 작별의 인사를 한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 선배 중에서도 참 괜찮은 분이다. 그의 꿈과 야망이 언젠가 울산 땅에서 꽃필 날이 있으리라 예견하면서 우린 종로 대학로를 따라 한참 걷다가 버스정류장에서 각기 집으로 헤어졌다.
 
 
 
(민주화의 봄바람)
 
79년 10월 쿠웨이트 샤와파트공사 현장으로부터 1년만에 귀국하는 KAL 기내에는 사우디, 아부다비 경유 비행이라 수많은 한국의 기술기능인들의 열기로 꽉 찼다, 이제 막 랜딩을 시작한 비행기는 그리운 조국 김포공항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하더니 잠시 후 우리 일행을 김포국제공항에 내려놓는다.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공사 후에 두 번째 중동 해외 건설 현장이었던 쿠웨이트에서 1년간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이다.
 울산은 지난 격변의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대표적인 도시 중의 하나이며 사실상 국가재건과 민족중흥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상징적인 터전이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1962년 그러니까 종수가 중학교 3학년 때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첫 번째 사업으로 추진 된 역사적인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렸다. 제일중학교 1000여명의 학생들이 울산 읍네에서 그날 3열종대로 나란히 줄을 지어 20리 길도 넘는 길을 걸어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까지 전 각료가 참석한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납도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장으로 운집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곳이 바로 울산공단이 만들어진 출발점이었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난후 이 자리에 '한국 공업입국 출발지 기념비'가 세워졌고 비문에는 1

"민족중흥의 초석이 된 이 곳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길이 보존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한다"고 새겨져있다기공식장에는 물론 남녀 중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이후락 비서실장이 졸업한 울산농고(지금은 공고)와 울산여고, 그리고 군인들과 지역유지, 농어민들까지 수천명이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려고 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종수는

"5000년 가난의 역사와 보릿고개도 없애고 신라의 번성을 되찾자

축사하는 는 박의장의 의미심장한 내용들을 되새겨 가면서 이제 기공식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야음동 산길로 오던 길을 질러오면서 모처럼 울산에 하나 뿐인 야음 화장터구경도 하며 마치 멀리 소풍이라도 온 기분으로 평일에도 매일 연기를 내뿜는 화장 막 높은 굴뚝에도 올라가 보기도 하며 이 기공식장에 동원된 선후배과 어울려 재미있게 놀았다먼 길을 걸어 집으로 오는 도중에 간간히 쉬어가며 피로도 풀면서 겨우 저녁 무렵에야 집에 당도 할 수가 있었다. 종수는 이날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자신과의 굳은 약속을 하며 소년의 야망을 가슴 깊이 품었다

오늘 본 국가최고회의 의장의 연설과 울산의 각 학교 인솔 지도 선생님들이 공업센터 축하 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 각오를 다짐했다.

장차 반드시 울산공단을 건설하는 주인공이 되리라

종수는 가슴속 깊이 울산공단을 건설하는 주인공이 되리라는 포부를 굳게 다짐했다.

 

이때 세운 종수의 포부대로 중학교를 졸업하자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굳이 울산에 공업고등학교가 없으니 공업고등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유학을 결행한 것이다. 또 부산공고를 졸업하고는 기어이 상경하여 주경야독하며 한양공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는 일시 고향에 돌아와 석유화학단지의 카프로락탐 건설현장의 감독으로 그엿날 중학생 시절 자신과의 약속 "장차 울산공단을 건설하는 주인공"이 되겠다는 꿈을 실현한 후 서울의 건설회사에서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과 쿠웨이트 건설현장 소장의 임무를 맡아 열사의 나라에서 외화를 벌어드리는 일에 땀을 쏟았다. 

 

 
국제종합건설 본사에 들러서 귀국 보고를 하고 잠시 휴가를 얻어 울산으로 돌아와 고향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그 날 아침 일찍 정확히 27일 눈을 뜨자마자 대문 앞에 떨어져 있는 신문지를 주워보니 전면 탑(top)으로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다. 엄청난 사건이다. 너무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동향의 친구이자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신복이기도 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시해 된 것이다.
 
군사독재 정권 18년의 종지부를 찍는 대사건은 한국 정치 사회에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키며 격변으로 몰아넣고 있다.
 
합천 출신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인물이 서서히 한국 정치무대의 중심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난국을 헤치며 위기사태를 수습하고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안정을 찾아가자 전두환은 소위 통대들의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격렬한 대모와 광주사태까지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는 한편, 드디어 대부분의 야당 정치 거물들을 정치정화법으로 묶어 피선거권을 박탈한 가운데 제11대 국회의원 선거가 80년 4월에 실시되었다.
 
울산시에서 2사람을 뽑는 중대선거구제 하에 7-8명의 후보가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나서는 가운데 집권 민정당 1사람과 나머지 7명도 제각기 정통 야당의 맥을 잇는다는 신당 혹은 군소정당에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고 민심은 현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등을 돌리고 야권에 새로운 인물을 찾고 있는데...
 
과연 민심은 천심이라고 국민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고 그 여망에 호소 할 수 있는 전통적인 야당의 맥을 연결지어 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찾고 있다. 그래도 역시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후보는 울산 읍내 초등학교 출신으로는 정부 수립 후에 최초로 여당 후보로 출마 하였다 하여 최고 부호의 손자인 고원이 막강한 재력과 조직력으로 대세를 굳힌 듯 하다.
 
오래 때를 기다리며 준비해 왔던 심완도 드디어 갈고 닦은 정치적 야망을 펼치며 새로운 민주 정통 야당의 맥을 이었다는 신당의 기치를 들고 고향 울산의 선거전에 뛰어들었다.
 
또 하나 호소력 있게 시선을 모으며 범서 출신의 이정이란 젊은 정치 신인도 특유의 달변으로 동정표를 모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지난 10대에 출마하여 거물 HR을 향해 맹공을 퍼부으며 ‘사자는 굶어도 풀을 먹지 않는다.’란 명언을 인용하며 용기 있게 잘 싸웠기에 인지도에도 어느 후보보다 앞섰다.
 
또 <초등학교 교사인 우리 아버지의 퇴직금으로 내 선거 공탁금을 마련하고 옥교동 시민극장 뒤에다가 천막을 치고서 선거를 치른다.> 는 동정표 전략으로 나갔는데 동병상린인지 결국 역전시장 상인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한편 전두환 총재의 여당인 민정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한 고원 후보는 막강한 집권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하였기에, 평소 울산 변두리 시골 출신으로 서울에서 출세한 거물들을 옹립하며 참모로 일했던 울산읍내의 내노라하는 기름종이들과 정치 건달들도 모처럼 대양 호텔로 고원의 선거 캠프로 몰려들며 금권선거의 진수를 유감없이 맛보고 있었다.
 
고원의 조부 고귀는 성남동에서 술도가를 차려 재력을 키우며 후일 울산제일의 거부로 성장하여 울산 초대읍장을 지냈으며 부친 고태는 당대의 실세인 우석과 교류하며 조흥은행장을 지냈으며 울산의 최강의 토호로 고원의 뒷배가 되었다. 이즈음 유세장에서 특유의 달변가인 한 야당 후보는 <요즘 울산시내에는 똥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심완은 오래 때를 기다리다 별로 시기가 부적절한 선거전에 임했음을 감지했음인지 나름의 정통 야당의 모든 인맥과 공들였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정치 정화법에 묶여있는 최우의 정치적 계승자로 그 공백을 메우려 특유의 마당발로 시내를 샅샅이 누비며 호소를 했으나 초반의 기세가 점점 시들해 지는 모습이 점차 선거판세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아무래도 첫 출마의 서투른 모습을 숨길 수 없었으며, 정치적 쇼맨십과 야당 투사다운 언변이 부족했다. 선거전은 점차 현 신군부 세력을 강력히 비판하며 최우처럼 맞서 싸우는 투사형의 자리를 메우거나 아니면 동정표 쪽으로 표심이 기울어져 가는 경향을 뚜렷이 감지할 수 있었다.
 
결국 막판 판세는 동정표 바람이 11대 울산 선거를 휩쓸기 시작 했으며 그래도 끝까지 막강한 재력과 권력이 뒷받침이 되어 조직력을 총동원함으로써 집권 여당의 프레미엄으로 그나마 나머지 부동표까지 흡수하므로 개표 결과는 이름도 없는 신당 근로당의 총재가 된 이정이 1등으로 일찌감치 당선권을 확보 했고 나머지 2위는 집권당 고원이 은배지로 가까스로 당선 되었다.
 
그래도 고원이 국회의원에 당선 된 것은 울산읍내 토박이면서 울산초등학교 출신으로는 그동안 언양이다 강동, 두동등 주로 변두리 지역에서만 인물이 난다는 정설을 뛰어넘는 울산 유사이래 처음 있는 울산읍내 북정동 출신 국회의원 탄생일이었다. 울산읍내 출신이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도 전무후무였으며 이때까지 울산 읍내(요즘 울산의 중구에 해당) 본토에서 당선 된 사실은 울산 선거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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